본문 바로가기

자세한 이야기/영화

1. 오펜하이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I 오펜하이머

반응형
 
오펜하이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하는 천재 과학자의 핵개발 프로젝트.
평점
7.2 (2023.08.15 개봉)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조쉬 하트넷, 캐시 애플렉, 라미 말렉, 케네스 브래너

 

안녕하세요, 이번엔 영화의 주인공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주인공은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미국의 물리학자입니다.

 

제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도 그렇지만, 배우 킬리언 머피도 정말 좋아합니다.
이 둘은 인셉션, 다크나이즈 시리즈, 덩케르크에서도 합을 맞춘 적이 있는데, 킬리언 머피가 주연으로 나오는 놀란 감독의 작품은 이번 영화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사실 개인적으로 영화 내용보다는 이 이유 때문에 더 기대를 했었던 것 같아요..ㅎㅎ
이 포스팅은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공부도 할 겸 적었던 걸 블로그에 올리게 되네요.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오펜하이머에 대해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펜하이머, 출처 : 나무위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미국 뉴욕주 뉴욕시에서 1904년 4월 22일에 태어났습니다.
오펜하이머의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이 승승장구하여 상당한 갑부였다고 합니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는데, 빠르고 탁월한 학습능력과 교육환경도 훌륭하였기 때문에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22년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들어가고 학교 시절 매년 남들보다 1.5배 더 많은 학점을 따며 4년제 학사과정을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언어에도 재능이 있어서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오펜하이머는 당시엔 미국이 과학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1924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물리학과로 유학을 갑니다.
재학 도중 그는 신경쇠약 및 우울증에 걸렸으며 지도교수를 독사과로 독살하려는 등의 소동이 있었으나, 물리학에 점점 심취하며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1926년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로 떠나게 된 오펜하이머는 물만난 물고기처럼 공부하여 9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캘리포니아 버클리 분교에서 각각 강의를 하게 되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 등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출처 : 위키백과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에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아인슈타인 자신의 상대론에서 유도된 질량 에너지 등가원리가 당시 발견된 핵분열에 응용이 되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폭탄이 만들어질 것이고, 이러한 무기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 손에 먼저 들어간다면 끔찍한 재앙이 될 거라고 당시 대통령인 루즈벨트에게 보냅니다.
편지를 읽은 루즈벨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히틀러보다 빠르게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곧장 맨해튼 프로젝트를 승인합니다.
루즈벨트의 지시에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비밀리에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맨해튼에 소집시킵니다.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상부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결국 비밀리에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책임자로 결정됩니다.
뉴멕시코의 사막 지대에 거대 연구기지가 세워지며 책임자가 된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 시카고, 버클리 등지에서 동일하게 진행되던 핵분열 연구를 한 곳으로 모아 공동연구를 하도록 강조했으며, 전국의 맨해튼 프로젝트 소속 기관들의 연구 개발 활동을 통합하여 사용 가능한 핵무기를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됩니다.

 

출처 : 브런치 스토리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패망하게 되지만, 미국은 이미 최초의 원자폭탄 제작에 성공합니다.
7월 16일, 뉴멕시코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인물들이 보는 가운데 최초의 핵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비밀리에 진행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데, 이 엄청난 폭발과 충격파는 뉴멕시코 전역에 퍼졌지만 정부의 공식 답변은 공군 기지의 무인 탄약 창고가 폭발했다는 짧은 언급뿐이었고, 미국 동부 지역에서는 아예 화제조차 되지 않을 만큼이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빠른 전쟁 종결을 위해, 그리고 20억 달러의 거금이 들어갔던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 없이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20억 달러를 둘러싼 후폭풍을 막기 위해 세계 최초로 실전을 위해 제작한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폭발시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항복을 하지 않던 일본에게 3일 뒤 이보다 더 강한 역사상 첫 플로토늄 원자폭탄인 ‘팬맨’을 나가사키에 투하하게 됩니다.
일본은 결국 8월 15일 항복을 하게 되며 한국도 광복을 맞게 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대중에게 알려지며 오펜하이머 역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과학무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는 이후 대학교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통해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게된 오펜하이머는 무차별 살상을 하게 되는 대형 핵무기보다 전술적인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건의하며 개발 계획에도 참여합니다.
하지만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원자력 관련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조치를 받게 됩니다.
‘오펜하이머 사건’으로 그의 경력이 끝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로 인해 은퇴를 하며 1967년 후두암으로 향년 62세에 사망하게 됩니다.

 

제니퍼 글랜홈, 출처 : 위키백과


그의 사망 후인 2022 12월 15일.
제니퍼 글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보안 승인에 대해 1954년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은 위원회 자체 규정을 위반한 결함 프로세스"라며 "오펜하이머 박사가 겪은 과정의 편견과 불공정에 대한 더 많은 증거가 밝혀졌고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은 확인됐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오펜하이머는 구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68년 만에 벗게 됐습니다.

 

알아보다 깜짝 놀란 부분은 맨해튼 프로젝트는 20억 달러, 현재가치로 총 300조의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였다는 것입니다..
프로젝트를 위해 뉴멕시코에 세워진 비밀 연구소는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를 포함한 총 6,000여 명이 거주하는 하나의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누명에 대해 들을 때마다 제가 더 안타까울 정도였습니다..

반응형